자아 과잉이 인정욕구로 표출, 타인에 대한 정서적 강박으로 묶인 모래알의 시멘트화

미궁을 통과하여 일상을 바꾸어가는 '교육연극' 수업이 곳곳에 피어나길

[교육플러스] 자아를 찾아가는 동시에 만들어가는 교육, 세계를 체험하고 인식하는 연극. 이 두 가지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교육연극’을 통해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혼자서 이길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함께 열어가는 사랑의 지평. 역사학자 뤼시엥 페브르는 어디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각의 시대는 심성적으로 자신의 우주를 만든다”고. 저는 10회에 걸친 교육연극 이야기로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입시, 실력주의 따위의 보자기 만한 시야에서 벗어나 우리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고. 어떻게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교실, 오승희의 '교육연극 이야기'로 당신을 초청합니다.

철학자 들뢰즈는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화란 단어가 찾아오면 저 문장과 함께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허문영.

연극과 영화의 경계가 흐릿한 증강현실의 무대 예시.(출처=https://m.youtube.com/watch?v=wZCxiXCNzCI)
연극과 영화의 경계가 흐릿한 증강현실의 무대 예시.(출처=https://m.youtube.com/watch?v=wZCxiXCNzCI)

정성일 선생님은 위 문장을 이렇게 풀어 적었습니다.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그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그 방법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영화를 사랑하는 건 세상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말하자면 영화를 사랑하고 또 하면서도 갈증에 시달리는 것은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들뢰즈의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사랑에는 어떤 숭고한 면이 있다.”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방법’을 영화에서 찾아 헤매는 숭고함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만족할 방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세상을 보듯 영화를 보고, 영화를 보듯 세상을 본다. 달리 말하면, 영화는 보이는 세상이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이 문장을 적은 허문영 선생님이 말했듯 ‘안전이 확보되는 거리’만 주어진다면 세상은 영화로 전환됩니다. 보다 명확히, 아니 보다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윤리가 소실되는 영화로요. 저는 두 가지를 직감합니다.

• [실제] 안전이 확보되는 거리를 지닌 세상이 축소됨으로써 소멸되는 영화
• [가상] 안전이 확보되는 거리를 지닌 세상을 확장함으로써 영화로의 도피

위 둘은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여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날 것입니다. 윤리의 상실. 이국의 전쟁도 영화처럼 감상하거나 전쟁으로 격화된 일상인 것이지요.

앞으로 우리는 들뢰즈의 문장과 정성일의 애정, 허문영의 관조를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세상은 역륜(逆倫)이 될 것이라고. 견고한 추억마저 녹아내리는 시대,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는 이러한 세태를 한 문장으로 적어두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Jenny Holzer, Protect me from what I want, Times Square, New York, 1985.)
(Jenny Holzer, Protect me from what I want, Times Square, New York, 1985.)

자유는 질서의 파생어입니다. 질서가 전제되지 않으면 자유는 존립할 수 없지요. 무질서 즉 혼란 속에선 오직 힘이 자유를 독점하니까요.

대개 자유를 정의할 때, 그 앞에 (개인의)라는 괄호가 생략되어 있다고 여기곤 하지만, 본디 자유는 ‘관계의 어휘’입니다. 자유는 공존 속에서 비로소 숨 쉬고 춤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화비평가 한병철은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는 문장을 인용하며 자유롭다는 것은 ‘성공적인 공동체’ 곧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동의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 이 인상적인 문구는 교사들의 교사인 파커 팔머의 것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상을 제시하는 동시에 현실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부재를 자각하도록 만듭니다.

지금 여기가 공동체가 아니라면, 그럼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한 제니 홀저의 경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어쩌면 우리의 자유는 욕망의 추구고, 이 욕망은 타인의 인정이며, 이 그물망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경영하고 닦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몸과 마음이 무언가 혹은 어딘가에 예속되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예속의 프레임과 지점이 바로 – 이전에 몇 차례 살펴본 – 미궁의 실체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미궁은 어떤 곳인가요. 그 내면의 풍경은 ‘1인 병실서 사망하는 준비에 여념이 없는’ 불안과 염려일지도 모릅니다. 수학자 허준이는 모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중략) 취업, 창업, 결혼,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1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정신 팔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이미지=Getty Images)
(이미지=Getty Images)

우리의 미궁에는 울고 있는 성인 아이(Adult child)가 있습니다. 어른의 모습이 못마땅함을 포용하고 기다리는 것이라면, 이 시대는 끊임없이 모두를 아이로 돌려세우며 성조숙증을 호소하고 있지요.

윤리의 퇴색에 휩쓸려, 옳고 그름의 순복을 버린 자아의 과잉이 인정욕구로 표출되며 타인에 대한 정서적 강박으로 묶인 모래알의 시멘트화. 이것이 우리 시대의 초상은 아닌지 자문해 봅니다.

어느 대담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적잖은 사람이 <이기적 유전자>를 오독 한다며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제 책은 한 마디로 ‘유전자는 이기적인데 어떻게 이타적인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입니다. 즉 유전자는 결국 더 많은 자기 복제본을 남기기 위해 인간을 이타적이게 만들었다는 얘기니까요.”

이러한 사고가 환원론적 비약이란 견해는 차치하더라도, 이기적일수록 윤리적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국부론적 믿음 내지 자본주의 정신이 오늘의 감정노동으로 귀결된 것은 아닐지요.

깊은 밤처럼 어두운 시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긴요하지만, 그 누구도 만족할만한 답을 할 수 없습니다. 큰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담긴 작은 이야기와 연결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고, 이러한 성화의 수수께끼가 일어나는 장소가 미궁이니까요.

다만, 여기에 교육연극이 기여할 점이 있다면 미궁을 통과하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수업을 끊임없이 지향한다는 것이겠지요.

(이미지=Adobe Stock)
(이미지=Adobe Stock)

교육연극은 의미와 목적을 찾는 탐구인 동시에 이것을 넘어서는 여정입니다. 단순히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의식화로 나아가겠지만, 여전히 기존의 인식 틀 내에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려 하고, 그 끝은 - 의식은 깨어났지만 몸은 묶여 있는 - 수술 중 각성(intraoperative awareness) 상태, 곧 '무력한 의식화'로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눈이 정확할지라도 세계는 우리의 시선을 성찰하지 않지요. 생각하는 갈대에게 남는 것은 내면의 공허일지도 모릅니다. 하여, 미궁을 통과하여 실재와 연결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주어진 규칙 안에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생성하는 마음의 배치를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일상을 바꾸어가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칭찬은 잘하면 얻는 것이고, 격려는 못 해도 받는 것입니다. 전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고, 후자는 실패에 대한 면역력을 북돋지요. 이런 점에서 칭찬에 반응하는 고래의 춤은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몸부림을 감추기 위해 쓴 가면이, 얼굴이 된 사람은 가면을 벗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육연극은 마음의 가소성이 조금이나마 더 파릇할 때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미지=iStock)
(이미지=iStock)

어른이 되어 무의미한 일상을 견디거나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고자 정신의학적 처방이나 별도의 상담심리를 받으려면 문턱이 낮지 않습니다. 선입견과 주위의 편견, 비용과 시간의 문제 모두 다 부담이 되지요.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학교를 통해 내면의 틀을 건강히 형성하는 수업을 일종의 마을 커뮤니티처럼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혼자서 이겨낼 수 없는 시대를 함께 견디고 이해하며 그 너머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처럼요.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승희 극단 유랑선 소속 연극배우/ 교육연극 지도교사.
오승희 극단 유랑선 소속 연극배우/ 교육연극 지도교사.

# '오승희의 교육연극'을 마칩니다. 그간 연재해주신 오승희 선생님과 애독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작권자 © 교육플러스(e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